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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트로피컬 나이트 - 여름밤 읽기 좋은 조예은 단편소설집

by 지슈룬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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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트로피컬 나이트>


소개

여행을 갈 때면 꼭 책을 한 권씩 들고 갑니다. 짧은 시간에 잠깐 읽다가 덮어두고 다시 꺼내서 읽어도 아무렴 괜찮은 책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장편소설이나 고민이 깊어져야 하는 책은 여행의 찰나의 순간들에 읽기는 조금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여름 나들이에는 조예은 작가의 <트로피컬 나이트>를 들고 떠났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읽기 좋은 스릴러, 공포가 있는 단편소설 모음집입니다. 조예은 작가의 책은 <스노볼 드라이브>로 처음 접했는데 경쾌하고도 몰입감 넘치는 과학적 디스토피아 장편소설이었습니다. 굉장히 신선한 디스토피아 세계의 설정에 놀라기도 하고 읽으면서 무한히 빠져드는 몰입감에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작가의 가장 유명한 단편 소설집인 <칵테일, 러브, 좀비>를 읽고 톡톡 튀는 새로운 허상 속에 스토리와 구성이 탄탄하게 잘 짜여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젤리소다맛 괴담집이라고도 소셜미디어에서는 표현되는 걸 보았습니다. 가볍게 읽기 좋아 삼십 분씩 단편 하나를 읽고 쉬고 또 읽으며 즐거운 여행을 했습니다. 책의 표지만큼이나 톡톡 쏘는 트로피컬 탄산 음료 같기도 한 <트로피컬 나이트>는 유머도 있고 사랑스러움도 느낄 수 있지만 밤에 혼자 누워 읽다 보면 살짝 섬뜩할 수도 있을 만큼 분명한 호러, 스릴러 소설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여름밤에 더위가 느껴진다면 혼자 이 책을 들고 침대에 누워서 읽으면 더위가 싹 가실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보다는 제게 임팩트는 덜 했지만 조예은 작가만의 세계를 완성해 나가는 듯 작가만의 장르가 확실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잔인한 묘사도 있는 만큼 중학생 이상의 연령대에서 읽는 걸 추천합니다. 그중 가장 재밌었던 단편 두 편을 소개합니다. 


줄거리

<고기와 석류> 

남편이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앞에서 빨간 들짐승 같은 존재를 봅니다. 그 존재는 쓰레기 더미를 뒤적이며 악취 나는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자세히 보니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 겁도 없이 집으로 들여와 목욕부터 시킵니다. 목욕을 시키며 낯선 존재에게 세게 물려 응급실까지 가서 손목에 응급 처치를 받습니다. 새빨간 눈이 마치 석류 같아 석류라는 이름을 붙이고 강아지를 기르듯 인간이 아닌 존재 석류를 키웁니다. 정육점에서 매번 고기를 사다 먹이지만 점점 석류는 야위어갑니다. 석류는 악취 나는 고기, 즉 썩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구나 깨닫습니다. 다른 사람의 애먼 시체 대신 남편의 무덤을 파서 남편의 썩은 시체를 석류에게 먹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도 암에 걸렸으니 죽으면 석류가 나를 먹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공포스러운 마음보다는 오히려 안도를 느낍니다. 

주인공이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다가도 남편의 시체를 먹이는 부분과 스스로 잡아먹히는 생각을 할 때는 소름 돋습니다. 외로운 존재가 외로운 존재에게 위로를 찾고 또 위로를 받는 방식이 섬뜩하다가도 따뜻한 느낌이 동시에 드는 소설입니다. 책을 덮고 나니 가장 인상 깊었던 편이었습니다. 

<릴리의 손> 

'틈'이 벌어져 새로운 세상에 떨어집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상태에서 입으로 뱉은 말은 '연주'였습니다.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혹시나 무언가 기억이 날까 해서 찾아간 사고 현장에서 연주는 '손'을 발견합니다. 가짜 손, 그러나 진짜 같은 손을 품고 돌아오는데 손은 따뜻하기도 하고 가끔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섭다기보다는 왠지 위로가 됩니다. 

그 손은 사실 연주의 손이었습니다. 세상과 세상, 차원과 차원 사이에 벌어진 '틈'에 빠지면 모든 기억을 잃게 됩니다. 릴리와 연주는 다른 세상에서 연인이었고 릴리가 벌어진 '틈'에 빠져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됩니다. 릴리를 구해주려고 한 연주의 손과 함께. 이 세계에서 연주는 원래 '틈'으로 들어온 이방인이었습니다. 연주라는 이름이 마지막 기억이었던 건, 릴리가 사랑했던 사람이자 마지막까지 부르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릴리는 새로운 세상에서 무엇인지, 또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인지 모를 그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연주가 릴리를 그리워하며 쓴 편지에 이 세계에서 첫 틈이 발생했을 때 최초로 틈을 넘은 실종자 이야기를 씁니다. 그 노인의 이름이 '연주'라서 더 신경이 쓰인다고 합니다. 사실 그 노인이 릴리였던 것입니다. 틈을 넘은 릴리가 언젠가 다시 연주를 만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슬프고 그리운 감정이 가득한 소설이지만 마냥 슬프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틈을 넘나들고 기억을 잃지만 서로를 평생 그리워하고 또 언젠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라서 그럴까요. 하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건 속이 텅 빈 기분, 알맹이가 없는 기분입니다. 언젠가 시공간을 넘어 만나게 되는 둘이지만 연주와 릴리는 살아가는 동안 둘이 재회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겁니다. 평생을 알지도 못하는 그리움으로 살아가야 했던 릴리와 연주 당사자들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애석하고 그립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읽다보니 한 편의 짧은 외국 영화를 본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야기에 살을 붙여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는 작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예은 작가의 소설들은 허구의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들이지만 설정과 묘사가 디테일해서 눈앞에 생생하게 장면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언젠가 조예은 작가의 단편이나 장편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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