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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단편소설집 소개, 추천

by 지슈룬 2024.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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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쇼코의 미소>로 최은영 작가를 처음 접했었는데 <쇼코의 미소>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오는 묘한 순간, 감정을 자연스럽게 짚어냈다면 <내게 무해한 사람>은 더 깊어진 불편함까지 보여주며 인생에서 쌓아나가는 ‘관계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과거에 단절되었던 관계들부터 지금까지 인생 어딘가 개입되어 있는 인연들까지 독자는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친구들, 연인, 가족 사이에서 느꼈던 밀도 있는 친밀감과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모두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최은영 작가의 문체는 언제나 간결하지만 흡입력 있고 따뜻하지만 꿰뚫어보는 듯한 냉혹함이 함께 느껴져 이번 책도 좋았습니다.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파고들며 그들의 감정과 갈등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 독자도 상황 속에 푹 빠지게 합니다. 정교한 묘사와 세밀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힘은 항상 독자를 이야기 속 인물 중 하나로 끌어들여 몰입되게 합니다. 작가의 문체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주변에서 있을 법한 인간관계와 인물들의 심리를 있는 그대로, 또는 훨씬 깊이 반영하고 있어 언제나 공감이 갑니다. 꾸준히 책을 내주시고 있어 읽을 책이 계속 생겨나 기쁜 마음입니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총 7개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좋았던 몇 개의 단편을 아래에서 소개합니다.

줄거리

<그 여름>
첫 번째 단편인 그 여름에서는 수이와 이경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 그리움까지 다룬 이야기입니다. 수이와 이경이라는 이름이 둘 다 중성적이어서 누가 남자고 여자지 궁금해했는데 둘 다 여자였습니다. 둘의 사랑은 남의 눈을 의식하고 숨겨야 했지만 그래서 더욱 서로가 서로에게 애인, 친구, 가족의 모든 역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수이와 이경은 서로만 의지하며 사랑이자 우정, 가족애를 끈끈하게 키워왔으나 이경은 결국 은지라는 새로운 존재에게 두근거림을 느끼게 됩니다. 수이와 이경은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사랑을 했고 이별을 합니다. 십여 년이 지나서도 이경은 고향에 갈 때면 그 여름날의 수이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짙게 보냈던 계절인 여름만 되면 이경은 그리고 아마 수이는 서로를 떠올리고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동성애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보면 결국 <그 여름>은 아름답고 그리운 누군가의, 우리 모두의 첫사랑 이야기입니다.

<601, 602>
주영의 옆집에 살던 효진과 가족들은 경상도의 칠곡이라는 도시에서 왔습니다. 처음에는 효진의 사투리가 굉장히 심해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저도 경상도 출신으로서 경상도가 다른 지역보다 유교 사상이 더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배경이 지금보다 훨씬 이전으로 설정된 소설 속 효진네 가족은 남아 선호 사상이 뚜렷하고 유교적입니다. 효진의 오빠 기준이 효진을 때리고 함부로 대해도 그 누구도 기준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효진의 엄마조차 오히려 기준을 어른인 자신과 동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높게 대하는 수준입니다. 주영의 엄마는 그런 효진네 가족을 욕하지만 사실 주영의 엄마도 아빠가 맏아들이기 때문에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가족들의 압박감에 두 번이나 낙태를 했던 슬픔이 있습니다. 효진네 가족은 다시 칠곡으로 돌아가고 주영은 스스로를 효진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고 밝힙니다. 유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효진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반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주영은 효진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 엄마가 아들을 낳았어. 이제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해질 거야 ‘라고 씁니다. 요즘은 딸을 더 선호하는 듯하지만 이전에는 대를 이을 수 있는 남아선호사상이 우리나라 전반에 강했습니다.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다 똑같은 아이고 나의 핏줄인데 말입니다. 여자로 태어나서도 남자아이를 선호하고 차별한 할머니들은 자신의 처지가 못마땅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시대적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려서였을까요.

<모래로 지은 집>
고등학교 시절 글쓰기 천리안 동호회의 회원이었던 공무, 모래, 나비는 오프라인에서 모임을 갖게 됩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곳에 모인 셋은 만남을 이끄는 모래의 주도로 가장 친한 사이가 됩니다. 나비는 공무와 모래 사이에 사랑의 기류를 느끼지만 모래의 고백을 공무가 받아주지 않아 둘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나비가 모래에게 공무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모래는 공무를 생각하는 만큼 나비를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너를 생각한다는 대답이 몇 번 다시 읽어볼 정도로 다정해서 모래는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비는 모래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움을 모르는 낙천적이고도 의존적인 성격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모래가 엘에이로 떠나며 나비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에서 나비는 스스로를 절대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나비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고 말합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또 반대로 나도 누군가를 내 마음에 들도록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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